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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왜란

진주성

archerea 2020. 12. 4. 19:58

임진왜란 진주성

 

진주성 1차 전투
진주성 2차 전투

 

실제로 화살을 대주는 사수가 두 명 세 명 따라 붙는데, 그들이 손이 바쁠 정도로 황진 장군이 활 시위를 계속 당겼다고 합니다. 황진 장군은 아무리 강한 활도 무리 없이 당겼으며 얼마나 활을 빨리 빨리 쏘는지 앞에 앞에 가는 화살이 적의 몸에 꽂히기도 전에 뒤에 화살이 따라 날라갔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웅치 이치 전투 때 황진 장군이 활을 하도 많이 당겨 엄지에 살이 다 문드러져서 엄지 손가락에 뼈가 드러났다고 합니다.

 

진주성 역사 탐방 : 

황진 초상

황진 장군 (Wiki 참조)

1550년 황희의 5대손이자 황윤공의 아들로 지금의 남원군 주생면 영천에서 태어났다. 1570년 초시(初試)에 합격하였고 이후 1572년 선조 5년 27세에 무과(武科)에 급제해 선전관에 임명돼 함경도에서 6년을 근무했다. 거산도찰방과 안원권관을 위시해 하위 관직을 거쳐 선전관이 됐다.

조선통신사

1590년 황윤길(黃允吉) 일행을 따라 조선통신사로 일본에 다녀온 후 제용감 주부를 거쳐 동복현감이 되었고 왜란의 기미를 감지하고 공무가 끝나면 말타기와 활쏘기를 부지런히 익혔다.[2]

1592년 6월 왜군이 전라도와 충청도를 침범하자 이광(李光)이 권율을 도절제사로 삼고 영남과 호남의 경계에 나아가 수비했다. 황진도 이광의 휘하에서 전투에 참가해 왜군의 침입을 방비했다.[3] 용인의 전투에서 패해 남하하던 중, 진안에 침입한 왜군의 선봉장을 사살하고 이어 안덕원(安德院)에 침입한 왜군을 격퇴했다.

이치 전투

7월 훈련원 판관으로 이치전투(梨峙戰鬪)에 참가해 왜군을 격퇴했다. 왜군의 대병이 이치를 침범하자 권율이 황진을 독려해 동복현의 군사를 거느리고 이치를 점거해 총탄에 맞아 부상하기까지 하면서 대승했다. 당시 왜군이 조선의 3대 전투를 일컬을 때 이치(梨峙)의 전투를 첫째로 쳤다. 이복남과 황진은 이 전투로 이름을 떨치게 되어 이 공으로 황진은 익산군수와 충청도 조방장을 겸했다.[4]

1593년 2월 전라병사 선거이(宣居怡)를 따라 수원에서 왜군과 싸웠고 3월에는 충청도 병마절도사가 되어 진(陣)을 안성에 옮기고서 군대를 훈련시켰고 죽산성의 왜군과 대치 중 왜군이 안산성을 함락하고자 죽산성을 나와 안성에 진군하자 맞서싸우면서 죽산성을 점령했고 퇴각하는 왜군을 상주까지 추격해 대파했다.

제2차 진주성 공방전

1593년 6월 왜군 10만이 진주를 공략하자 김천일(金千鎰), 병마절도사 최경회(崔慶會) 등과 진주성에 들어가 제2차 진주성 전투를 벌이다가 9일간의 항쟁 끝에 전사한다.

인간 관계

그는 최경회(崔慶會) 의병장과 1562년 유교 성리학 수학 시절 사형제(師兄弟) 관계를 맺었는데 이후 1593년 임진왜란 때 사형(師兄) 최경회 의병장과 함께 진주성 전투에서 함께 전사하였다.

사후

황진의 사후 좌찬성에 추증되고 진주의 창열사(彰烈祠), 남원의 민충사(愍忠祠)에 제향됐다. 시호는 무민(武愍)이다.

 

 

오마이뉴스 - 황진 장군

 

전쟁 예견, 일본에서 칼 사들고 귀국한 장군

임진왜란 이치 전적지에 가다②

www.ohmy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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